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은 ‘원철별’로 널리 알려진 자신의 천문학 연구를 통해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고, 연희전문 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천문학 교육에 힘썼다. 해방이후 중앙관상대 초대대장으로 16년 동안 재직하면서 기상인력을 키우고 관련된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우리나라 천문학과 기상학 분야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 과학자였다.
[생애와 경력] [주요업적] [과학사적 의의] [연구논문] [기타 자료]
생애와 경력
■ 출생 서울 다동(본적: 경성부 公平동 70) 李重億의 4남
■ 생몰년 1896. 8. 19.(음력 7. 11.) - 1963. 3. 14.
■ 아호 우남(羽南)
■ 학력 - 보성중학교 3년 수학 1908.9.-1911.2. - 오성학교 졸업 1911.2.-1912.3. - 선린상업학교 수학 1912.4.-1914.11. - 연희전문학교 수학 및 물리과(數學及物理科) 졸업 1915-1919 - 미국 엘비온대학 졸업 1921-1922 - 미국 미시간대학 이학석사 취득 1922-1923 - 미국 미시간대학 이학박사 취득(천문학) 1923-1926
이원철은 어릴 때부터 탁월한 기억력과 신속한 수치계산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중앙관상대장으로 재직중에는 필요한 전화번호를 모두 암기하고 있어 일상 업무 수행시에 전화번호부를 찾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원주율을 소수점아래 수십자리까지 외울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고 한다. 정식학교에 입학전 5년간 한학(漢學)을 사숙했으며, 이후에도 틈나는 대로 한서를 탐독해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연희전문 재학중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학생강사라는 신분으로 2년간 통계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연희전문의 수학교수인 선교사가 풀지 못하는 난제를 10분만에 풀어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교수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어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는데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선교사가 모든 경비를 제공해 미국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알려졌는데, 연희전문 교수였던 벡커와 미시간 대학의 교수이자 연희전문 교수를 지낸 루퍼스가 유학생활을 도와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큰형 이원상(李源祥)은 1929년 당시 미국 영사관 통역관을 지냈다고 한다.
■ 경력 - 연희전문학교 교수(수물과) 1926-1938 - 군정청(軍政廳) 학무국 기상과장(氣象科長) 겸 관상대 대장 1945-1948 - 문교부 산하 국립중앙관상대 초대대장 1948. 8. - 1961. 5. - 인하공과대학 초대학장 1954-1965 - 한국기상학회 초대회장 1947-? -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1960-1963 -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1961-1963
학위를 마치고 모교인 연희전문에서 12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박사학위 논문에서 연구한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이원철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원철성(원철스타)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실 그가 독수리자리 에타별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고, 에타별이 맥동변광성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었다. 비록 전문적인 천문학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반인들이 발견으로 생각한 것이었지만, 이원철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미국유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30세에 연희전문의 교수가 된 ‘천재’ 이원철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민중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존재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에서 진행했던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그는 연구 대신 교육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재능을 쏟아 부었다. 연희전문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고등교육 수준에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이학박사인 이원철의 천문학 강의는 연희전문의 자랑거리였다. 또한 원철성의 발견자로서 유명해진 이원철은 서울 YMCA에서 정기적인 대중강연 등을 통해 과학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섰다. 해방이 되자 이원철은 관상대(현 기상청의 전신)를 복구하여 운영하는 일에 매진했다. 관상대 초대 대장으로 15년을 넘게 재직하면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과 관련된 인력을 키우고 제반 제도를 확립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우리나라 기상학과 천문학 양 분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 처음으로 ]
■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1926년 미시간대학)로서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그의 연구는 해외과학학술지에 실렸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원철성’(源喆星, 또는 원철스타)으로 널리 알려지며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줌.
우남(羽南) 이원철은 1919년 연희전문을 1회로 졸업하고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1921년 도미하여 1년만에 앨비온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앨비온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앨비온 대학 출신으로 연희전문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던 루퍼스(W. E. Rufus) 교수와 벡커(A. L. Becker, 한국이름 密義斗) 교수의 후원 덕분이었다. 앨비온 대학을 졸업한 이원철은 루퍼스가 천문학 교수로 있던 미시간 대학으로 옮겨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를 시작하여 1922년 이학석사를, 1926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이학박사 학위였다.
이원철의 박사학위 논문은 독수리 자리 에타별에 대한 정교한 분광학적 관찰과 계산을 통해 그 별이 맥동변광성(脈動變光星)임을 밝힌 것이다. 맥동변광성은 시간에 따라 밝기가 변하는 변광성의 하나로, 별이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며 밝기가 변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변광성은 쌍성계를 이루는 두 별이 식(蝕)을 일으켜 밝기가 변하는 식쌍성(蝕雙星 또는 식변광성이라고도 함)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식쌍성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변광성들이 존재했다. 이에 대해 1914년 미국의 섀플리(H. Shapley)가 항성이 수축·팽창하며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맥동설(pulsation theory)을 정립하게 되었고, 이후 이 학설을 확인하기 위한 연구들이 앞다투어 이루어졌는데, 이원철의 연구도 그 중의 하나로서 당시 매우 앞서가는 연구주제였다.
이원철은 1924년 12월 미국천문학회(American Astronomical Society) 33회 학술회의에서 “사자자리 로별의 시선속도변화”(Changes in the Velocity of ρ Leonis)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 발표문의 초록은 Popular Astronomy 33권 5호(1925)에 수록되었다.(이원철은 영문이름을 David W. Lee로 표기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1923년 미시간 대학 천문대에서 관측한 분광사진(spectrogram)을 분석해서 사자자리 로별의 시선속도가 그동안 알려진 평균값보다 16km/s 이상 큰 50.5-63.3km/s에 달하며, 이는 그 별의 시선속도가 실제로 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밝혔다.
시선속도(radial velocity)는 물체가 시선방향으로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때의 운동속도를 말하며, 천문학에서는 천체의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도플러 효과에 의해서 구한다. 항성의 시선속도는 고유운동의 관측결과와 함께 항성의 실제운동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며, 항성의 자전이나 맥동, 신성의 폭발, 분광쌍성의 궤도 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원철은 1926년 9월의 미국천문학회 36회 학술회의에서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얻어진 연구결과의 일부를 발표했는데, 이 논문의 초록은 Popular Astronomy 34권 10호(1926)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전체박사학위 논문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대기의 운동”(Motions in the Atmosphere of η Aquilae), Publications of the Observatory of the University of Michigan, 4권 8호 (1932)에 수록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미시간 대학 천문대에서 31.5인치 카세그레인 반사망원경과 프리즘 분광기를 이용해 71회의 분광학적 관측결과를 얻고 이를 세밀하게 분석·계산하여 시선속도를 비롯하여 항성대기의 운동 등 독수리자리 에타별에 대한 다양한 결과들을 구해 세페이드변광성(Cepheid variable)에 대한 맥동설을 뒷받침했다.
독수리자리는 여름철에 하늘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은하수 가운데 있는 별자리로, 일등성인 알타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견우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별이다. 에타별은 약 7일을 주기로 4-5등 사이로 광도가 변하는 세페이드변광성으로, 1784년 빛의 밝기가 변한다는 사실이 영국의 아마츄어 천문학자 E. Pigott에 의해 발견된 이후 여러 천문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왔으며, 이원철의 지도교수인 미시간대학의 루퍼스 교수도 그 중의 한명이었다.
이원철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귀국하여 모교인 연희전문의 교수가 되었다. 그가 미국에서 거둔 학문적 성과는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안겨주었고,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대상이었던 독수리자리 에타별은 잡지 등에 ‘원철성’으로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원철의 전문적인 천문학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원철성’을 단순히 처음 발견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으나, 서구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민족의 자랑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원철성 및 이원철에 대한 당시 자료: “「원철」星까지 발견한 세계적 천문학자 이원철박사” 『삼천리』 3호(1929년 12월) 18-19쪽
“...미국 미시간대학의 學窓에 파묻쳤을 때에도 뛰어난 그의 才分은 수리문제를 向함에 釋然히 풀리지아니하는 것이 없고 또 천재라하리만치 독창력에 富하여 끝끝내 天文을 연구함에 있어서 數十年來로 精銳의 과학을 가지고도 수백의 세계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 개를 力學의 힘을 통하여 발견하였음으로 천문학자들은 놀래기를 말지 않아서 그 별 이름을 씨의 이름을 따서 「원철」星이라고 公稱한다고 합니다. 일즉 미시간대학 총장은 「이원철군은 지금까지 동양각국의 미국유학생중 처음보는 수재일뿐더러 구미에도 드문 놀라운 학자라」고 절찬하였다는 말이 있거니와...”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이원철은 서울YMCA가 일반인을 위한 교양강좌를 개설할 때 과학 강좌를 맡았다. 원철성의 발견자가 진행하는 목요 강좌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이 강연은 과학의 대중적 확산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다.
■ 당시 유일의 과학교육기관인 연희전문학교의 내실있는 운영과 발전에 선구적으로 역할함.
이원철은 연희전문 재학중에서 학생강사라는 신분으로 수학을 강의했으며, 졸업후 2년 동안 모교의 수학강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귀국하여 모교의 교수가 되어 12년 동안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면서 수물과장과 학감을 역임했다. 당시 국내의 여건에서는 미국에서 수행했던 연구활동을 계속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연구 대신 교육에 모든 정열을 쏟았다.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 이후까지 우리나라 천문학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천문학을 뿌리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기에는 중등학교에서 태양계에 관한 극히 간단한 내용이 지리교사에 의해 교육되었을 뿐 제대로 된 천문학 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희전문만은 예외여서, 루퍼스에서 벡커, 그리고 이원철로 이어지는 연희전문의 천문학 강의는 당시 거의 유일한 천문학 강의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첫 번째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원철의 천문학 강의는 연희전문의 자랑거리였다. 연희전문 건물 옥상의 임시천문대에는 15cm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원철은 이 망원경을 이용해서 실제적인 천문학 강의를 할 수 있었다. 1928년 연희전문 졸업앨범에는 이원철이 이 망원경 앞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사진이 실려있다. 하지만 이 망원경은 1942년 일제가 전시물자로 징발해가고 말았다.
1935년 이원철의 스승이었던 미시간 대학의 루퍼스 교수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조선에 돌아와 1년간 머물면서 천문학에 관한 우리의 옛문헌과 유적을 조사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고, 이원철은 이 과정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스승의 연구를 도왔다. 이원철은 정식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학(漢學)을 5년간 사숙한 경력이 있고 틈틈이 한서를 읽었기에 그의 한학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루퍼스의 연구를 지원할 수 있었다. 루퍼스는 1년간의 연구 결과를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회의 잡지에 발표했고(W. C. Rufus, "Astronomy in Korea",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26 no.3, 1936), 이 논문의 말미에서 루퍼스는 백낙준, 정인보와 함께 이원철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나타냈다. 이 논문은 고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통 천문학을 개관한 것으로, 34장의 관련 유물사진도 담고 있다.
이원철은 1938년 몇달 동안 연희전문의 학감을 역임한 뒤 12년간 몸담았던 연희전문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는 동우회사건, 흥업구락부사건 등에 관련된 연희전문의 교수들이 학교를 떠났고, 1938년에 4명의 학감이 연이어 경질되는 등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고 미국과의 전쟁이 예견되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연희전문에 대한 총독부의 압력이 매우 거세졌던 시기였다. 이원철이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3차에 걸친 동우회 관련자들의 검거가 끝난 다음인 1938년 5월부터 9월까지 학감을 지낸 것으로 보아 직접 관련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흥업구락부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흥업구락부의 회원명단이나 당시 검거자 명단에는 이원철이 들어있지 않다. 다만 흥업구락부 인사들이 YMCA와 관련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원철도 간접적이나마 흥업구락부와 관계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문제 때문에 학교를 떠나야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희전문을 떠나고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이원철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해방이 되자 일제에 빼았겼던 연희전문은 연희대학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이원철은 최규남 교수와 함께 기상학과를 독립된 학과로 신설하고 자신이 이학부장과 기상과장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원철이 관상대 대장 업무에 힘을 쏟으면서 연희대학의 전임교수로 일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그래서 4학년 학생들에게 천문학을 강의하는 정도의 활동만 할 수 있었고, 다음해에 기상학과는 물리기상학과로 개편되고 말았다.
■ 국립관상대 초대대장으로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 조직의 창설과 그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함.
이원철은 해방을 맞이하자 연희전문의 재건에 참여하는 한편, 관상감을 부활시키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관상감(觀象監)은 조선시대 천문, 지리, 기상과 관련한 사무를 담당하고 역서(曆書)를 펴내던 관청이었는데, 1894년의 갑오경장을 통해 관상감은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관상소(觀象所)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1907년을 전후하여 인천, 서울, 평양, 대구에 신식의 기상관측을 위해 측후소(測候所)가 설립되었고, 서울측후소가 편력과 일기예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측후소들은 일제시대에 들어와 조선총독부 관측소로 넘어갔고, 1940년에 조선총독부 기상대가 되었다.
이원철이 관삼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35년 루퍼스의 전통 천문학에 대한 연구를 도왔던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상감을 비롯한 천문·기상에 관한 유물 및 문헌을 접하면서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게 된 그는 해방이 되자 군정청 관계자와 만나 관상감 부활 문제를 논의했다. 군정청은 이원철이 기상관련 업무를 책임져줄 것을 부탁했고, 그에 따라 이원철은 1945년 9월 22일 미 군정청 학무국 기상과 과장이 되었으며, 10월 2일 관상대 복구 결정을 얻어내 조선총독부 기상대를 관상대로 재조직하고 자신이 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10월 15일 관상대의 부족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관상대 실습학교를 개설하여 중학졸업자 35명을 등록시켜 교육과 훈련을 시켰다. 이처럼 빠른 시간에 관상대 복구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이원철의 적극적인 노력과 그의 학문적 경력에 대한 군정청 관계자들의 신뢰와 기상자료에 대한 필요성 등이 결합된 결과였다.
관상대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문교부 산하 국립중앙관상대로 개칭되었다. 관상대에는 관측과, 예보과, 통계과 등의 기상 관련 부서와 역서 편찬을 담당한 천문과, 행정 사무를 담당한 총무과가 있었고, 이후 지방측후소(14개소) 및 출장소(2개소)를 세우는 등 기상행정조직의 틀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으며, 기상기술원양성소를 통해 필요한 기상인력을 키워냈다.
관상대 초대 대장으로 이원철은 이러한 발전과정을 이끌어냈으며, 천문과의 유일한 직원인 천문과장과 함께 자신이 직접 역계산에 나서 역서(曆書)를 편찬해서 배포했다. 역서는 음력날짜, 월령, 일월식, 조석, 24절기의 시각, 매일의 일월 출몰 시각 등을 계산한 결과를 담고 있는 책으로서 국민들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될뿐더러, 조선시대의 관상감이 담당한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서 자주적인 독립국가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매년 펴낸 역서의 서두에 실린 이원철이 직접 쓴 머리말(編首言)에 따르면, 부정확하고 미신적 행위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음력을 버리고 단일한 양력을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방송, 신문기고, 강연 등 기회있을 때마다 음력대신 계절의 변천에 맞고 정확한 양력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일제시대 YMCA의 대중 강연을 통해 과학을 알리던 계몽가로서의 모습이 해방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원철은 관상대 직원을 중심으로 1947년 3월 한국기상학회를 조직했다. 현재의 한국기상학회는 1963년 12월 창립되었으니 이원철이 조직한 한국기상학회는 현재 기상학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1958년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기상학회(Korean Meteorological Society)는 서울시 서대문구 송월동 1번지의 중앙관상대 내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회장은 이원철, 부회장은 서상문, 김진면이 맡고 있었다. 회원수는 170명에 달했으며, “기상연구를 돕고 그 진보를 기도하며 국내외 관계학회와 협력하여 학술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여 강연회 개최, 학술회합 개최, 기관지 발간 및 도서자료 등의 출판, 그리고 연구장려 위한 상장·상금 수여, 연구비 보조 등을 구체적인 활동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의 여건상 학회지를 펴내는 등의 본격적인 학술활동을 벌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기상학을 확고히 자리잡게 하려 했던 이원철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원철은 61년 5월까지 15년 이상 동안 관상대의 대장으로서 우리나라 기상 및 천문과 관련된 인력을 키우고 제도를 확립하여 기상업무의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인하공대 초대학장과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교육 및 사회활동을 활발히 전개함.
이원철은 인하공과대학 설립과정에 참여, 초대학장으로 선임되어 1954년부터 1965년 말까지 신설대학의 기초를 닦았다. 인하공대는 과학기술 분야의 지도적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로, 학계에 존경받는 전형적인 과학자로서 이원철이 학장으로 선임된 것이었다. 또한 1952년부터 연희대학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으며,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통합과정에 합동위원으로 참여했다. 1961년에는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비록 강단에 서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교육과 관련된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맡으면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이원철은 YMCA 재단이사와 이사장을 역임했는데, 자신의 전 재산(갈월동 가옥 및 금곡리 임야 등 3만6천여 평)을 YMCA에 기부하여 마지막까지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1986년 서울 논현동에 개관한 YMCA 강남지회 건물의 강당은 우남 이원철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우남홀로 명명되었다.
[ 처음으로 ]
과학사적 의의
이원철은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로서 원철성으로 널리 알려진 자신의 연구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여주었고, 12년간 연희전문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천문학 교육에 힘썼다. 해방 이후에는 관상대 초대대장으로 15년 이상 일하면서 기상인력을 키우고 관련된 법과 제도를 완비하여 기상업무의 기틀을 닦은 우리나라 천문학과 기상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연구여건이 뒷받침이 안되는 상황이었기에 과학자로서 그의 연구는 박사학위 논문 이후 계속되지 못했지만, 교육을 통해 인력들을 키워내고 기상업무체계를 구축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연구논문
“Changes in the Velocity of ρ Leonis”, Popular Astronomy, vol.33 no.5 (1925). “Motions in the Atmosphere of η Aquilae”, Publications of the Observatory of the University of Michigan, vol.4 no.8 (1932). “Astronomy", Korean National Committee for UNESCO, UNESCO Korean Survey (UNESCO; Seoul, 1960) "Meteorology", Korean National Committee for UNESCO, UNESCO Korean Survey (UNESCO; Seoul, 1960)
인수
고 이원철 박사님 ~ 대단한 분이시고 타인의 표상이 되는 존경스러운 우계인의 표상입니다.
호를 우남(羽南) 사용하셨군요. "羽" 자는 우계이씨를 뜻하는 것 같이 보이고, 남녁南은 그 나름의 뜻이 있겠지요?